단적으로 죽는 것 :『 매드 맥스 퓨리 로드 』 영화


   이 나라에는「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기묘한 말이 있다.

「명복」이란 것은 그것은 사후의 생명이 있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화자에게는 당연히 그 사후의 생명이 어떤 종교관에 따른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책임이 생긴다.세계 종교라고 불리는 것에는 분명한 사후 세계관이 있고 그래서 세계 종교로 될 수 있다.「죽음」이라는 극심한 공포에 대해서 아크로바틱한 설명을 원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명복」이라고 말해대는 사람들이 그러한 어느 종교에 기반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러한 사생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기 위해, 혹은「죽음」이라는 엄연한 분기가 자신에게도 찾아오는 것을 잊기 위해서,「죽음」의 존재를 남의 일로 하기 위한 클리셰로 쓰이는 것이 사실 아닌가.


   종교처럼 세계의 신화에서도 사후의 세계관은 뚜렷하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용감한 사람은 사후에 오딘의 궁전이 맞아주어 발할라의 연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도 오딘 신앙(Odinism)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오디니즘의 과격파가 일종 폭력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실제로 90년대 노르웨이 교회 방화 사건에서는 과격한 오디니즘이 한 원인이었다).오디니즘의 「용감하게 싸워야만 발할라에 갈 수 있다」라는 신앙은,「발할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현세에서 어떠한 폭력적인 일을 해도 괜찮다」라는 식으로 상식에 벗어난 행위를 정당화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내세가 중요하니까 현세의 환경은 알 바 아니잖아,라고 하는 것은 미국 남부 기독교 복음파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영화『 매드 맥스 퓨리 로드(2015년:조지 밀러 감독)』에 등장하는 폭군 임모탄 조 그리고 그를 구세주로 믿는 워 보이즈의 세계관은 매우 오디니즘 과격파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작중 대사에서는「영웅의 관」으로서「발할라」라는 명사가 몇 번이나 말해지고 있다.

   보통 인류의 절반 수명밖에 없는 워 보이즈는 위대한 임모탄·조 때문에 차를 타고 창을 휘두르고 그리고잘 죽는」것을 지상명제로서 살고 있다. 워 보이즈는 죽음을 각오하면「Witness me!」라고 외치며 주위의 동포들에게 자신의 용감한 최후를 지켜보게 한다(참고로,"Can I get a witness?"라고 하는 것은 복음파가 거대 교회의 열광에서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추구할 때에 외치는 문구이다) 워 보이즈는 용감하게 죽은 동료에게「잘 죽었다!」며 선망과 축복의 함성을 외친다.

   그렇다, 워 보이즈는 「너는 어차피 죽는다.그러니 임모탄 조를 위하여 싸우고 죽어라」라는 논법으로 세뇌된 인간이다.


「너는 어차피 죽는다.그러니」

   이 논법을 사용하면「그러니」에 이어 명령의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너는 어차피 죽는다.그러니 지금 당장 아이를 낳아라」
너는 어차피 죽는다.그러니 대의를 위해 싸우고 죽어라」
너는 어차피 죽는다.그러니 젊고 건강한 지금 빨리 죽어버려라」
   이 논법은 개인의 생명을「죽음」아래 단순화 해, 강권적인 명령을 이해시키는 실로 간사한 말이다.

   역사적으로「너는 어차피 죽는다.그러니」의 논법은 많은 어리석은 폭력을 빚어 왔다.
   유대인의「최종 해결」에서 「독일 인민의 생존 조건의 파괴」에 의해서 국가마다 자살한 나치, 맨슨 패밀리에서 옴 진리교에 이르기까지의 열악한 컬트까지.「살인을 정당화하는」어리석은 조직에는「너는 어차피 죽는다, 그러니」에 의한 명령의 강요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 퓨리 로드 』에서 워 보이즈의 일원에 불과했던 눅스(연 : 니콜라스 홀트)는 집단으로서의「전체」가 아닌「개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고 만다.모래 바람 속에서 장렬하게 폭사하는 것도 임모탄·조의 아내를 탈환하는 것도 그에게는 끝내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눅스는「영웅의 관으로의 문이 열렸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명예로운 죽음에게 미움받았어」라며 말을 늘어놓다.그러나「명예로운 죽음에게 미움받았어」그는 그것에 의해서 임모탄 조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며 목숨을 노렸던 대대장 : 퓨리오사가 이끄는 일행을 위해서 힘을 다하게 된다. 컬트적으로「잘 죽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뇌가 풀린다니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리고 눅스는 사랑에 빠진 소녀:케이퍼블에 최후를 지켜봐지며 죽는다.
그는「사랑하는 소녀 때문에 명예롭게 목숨을 잃은」것도 아니고「세뇌를 뛰어넘어 진정으로 의미 있는 목숨을 잃은」것도 아니다.여기에서는 죽음에 관한「명예」도「의미」도「가치」도 일절 
문제로 되어 있지 않다
   매드 맥스의 세계는 모래와 바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의 세계이다. 거기서는 인간의 목숨도 동물의 목숨도 관련이 없으며 반대로 말하면 그런 노골적인 세계에서의 삶에「명예」나「의미」나「가치」를 주려고 한 것이 임모탄·조의 세뇌였다.그러나 눅스에게 더는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다.그는「명예」도「의미」도「가치」도 없이 그 자신의 죽음을, 단적으로 죽을 수 있었던 것이였다.


   자신의 죽음을 단적으로 죽는다.이렇게 터무니 없는 건 없다.인간은 자신의 죽음이 뭔가「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고, 그 자체에「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그러므로 사람은 유서를 쓰는 것으로 스스로의 죽음을 의미부여해 매니지먼트나 마케팅에 의한 경쟁에서 적어도 가치 있는 삶을 구가하려 애쓴다.
   그렇다「잘 죽는다」란 이상은「잘 산다」란 이상과 공범 관계에 있다.「너는 어차피 죽는다 그러니」의 논법에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시기를 내새움으로써 현재의 생의 주체를 무화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할까 그 효과가 전부다.「잘 죽기」 위해 사람을 죽여라.「잘 죽기」 위해서 돈을 벌 수 있다.「잘 죽기」위해 타인을 앞질러라...
   인류는「잘 죽는」것 때문에 벌어진 어리석은 집단의 모습을 오랫동안 너무 많이 봐왔다.


   가치 있게 죽고 싶다.의미 있게 죽고 싶다.고귀하게 죽고 싶다.그런 욕망은 이제 일체 아무래도 좋다.『 퓨리로드 』의 눅스의 죽음은 「잘 살고 잘 죽는다는 이상 없이 인간은 인생을 마칠 수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그나마 희망을 나타낸다.「잘 죽는다」등을 일절 문제 삼지 않고「잘 산다」와는 일체 관계 없는 단적인 인생을 이루고, 명예도 없고 고귀하지도 않은 죽음을, 즉 자신의 죽음을 단적으로 죽는 것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 매드맥스 』은 오른쪽도 왼쪽도 미친 인간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그래도 적어도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찾아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고마워요 조지 밀러. 30년 너머의, 소중한 악몽과 같은 작열의 시 고마워요.


   그리고 관객은 현실과 마주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매드맥스는 사막과 초연과 피부병의 세계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아 가는 것은 차별과 과로사와 우울증의 세계이다.인간을 물건 취급하고 착취하고 여성을 출산시키기 위한 도구로 거리낌 없이 간주하는, 『 퓨리로드 』와 똑같은 지옥이 깔리고 있는 세계이다.
   매드 맥스 전야 같은 얘기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매드맥스에 살고 있다. 몬스터 트럭의 굉음도 불을 뿜는 기타연주도 없지만, 이미 인간 자체를 갈아서 으깨는 수레바퀴 밑에 깔려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은 얘기가 아니다. 아포칼립스와 같이 알기 쉬운 계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파가 안고 있는 종말적 세계관은「자신이 살아 있는 세대에서 하나의 시대의 종말이 왔으면 좋겠어」라고 하는, 역시「잘 죽는」것에 대한 쓸쓸한 욕망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죽음을 단적으로 죽는 것.『 매드맥스 퓨리로드 』는 우리가 그 도로에 살고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고귀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죽음을 단적으로 죽는 것. 그 고독은 가장「죽음에게 미움받고 있는」주인공 : 맥스의 고독이기도 하다.그러나「잘 죽는」것으로 부추겨져 죽는 것보다는 침묵을 지키고 사막 같은 삶과 마주보는 편이 차라리 낫다.
「Fury Road : 분노의 도로」란, 지금 자신이 살아있는, 바로 여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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