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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는 경쟁사회에서 피폐해진 일반인 남성이야말로 봐야하는 영화이다. 단순히 LGBT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번역) 영화

골든글로브 작품상 (드라마 부문)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문라이트'가 3월 말부터 일본에서도 공개되었습니다. 스토리와 구성, 영상미 등 여러면에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만, 관점을 둘 곳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작가 오노 미유키 씨는 이 작품을 어떻게 본 것일까요. 

단순한 "LGBT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문라이트" 이것은 섹슈얼 마이너리티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섹슈얼 마이너리티에 대한 영화도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 영화를 일본의 경쟁사회에 지쳐버린 평범한 남자들이야말로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샤이론은 마이애미의 빈곤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흑인 소년이다. 어머니는 마약중독에 샤이론을 방치하며 주위의 소년들로부터는 '호모'라며 괴롭힘을 당하고있다. 그런 그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은 마약 딜러 후안과 아내 테레사, 그리고 소꿉친구인 케빈 뿐.

이렇게 쓰면 폭력적이고 비참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스크린에 비춰지는 검은 피부의 파워풀 함과는 달리, 등장인물들의 섬세하고 정중한 말의 교환에 의해 각각의 관계가 그려진다.

제목의 유래는 「달빛을 받고 돌아다니고 있으면, 흑인 아이가 파랗게 보인다」라는 작중의 대사에서. 그 말대로 등장인물들의 검은 피부와 주변 경관과의 대비가 강조된 선명한 영상이 그들의 심정을 색채에 실어 마음에 달라붙는다.

구름의 흰색, T 셔츠의 흰색, 햇살이 눈부신 흰색. 해외 사이트에 따르면, 필름의 흰 부분을 하나 하나 수작업으로 투과하여 프로젝터의 빛이 직접 스크린에 반사되어 관객의 눈에 닿도록 편집하고 있는 듯 같다. 그래서인지, 모든 장면이 마음에 직접 꽂히는 듯이 아름답다.

나는 이 영화를 게이 친구가 SNS에서 절찬하고 있는 것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지만, 시작하고 얼마간은 주인공 샤이론이 게이임을 깨닫지 못했다.

주인공의 섹슈얼리티는 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면서도 주제로 그려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한 'LGBT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게이 러브 스토리라고 한마디로 단언할 수 없다 복잡하고 특수한 사회 문제가 배후에 있어, 보고 난 후 무조건 감동할 수 만은 없는 무게와 생각의 여지가 남아있다. 샤이론의 고뇌는 결코 자신의 섹슈얼리티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빈곤, 어머니의 방치, 동급생의 괴롭힘, 마약의 만연. 샤이론은 그 가혹한 세계를 그저 얼어붙은 하얀 달과 같은 두 눈으로 가만히 관찰하고 있다. 주위의 사람들을 보는 것으로, 자신의 미래를 점 치는 듯이. 어느 상대와 보내는 그저 한때를 제외하고는.

마약 딜러 후안은 말한다.

"자신의 길은 스스로 정해라. 주변이 결정하게 만들지 마라"-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씬 중 하나다.

하지만 그 말과는 달리, 후안이 마약 딜러를 생업으로 하고 있는 것은 분명 그가 태어나 자란 환경 때문이며, 샤이론 또한 마찬가지다. 빈곤과 범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흑인 커뮤니티의 떨쳐낼 수 없음. 그들이 안고있는 고통은 너무 뿌리가 깊다.

순수하게 누군가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

그럼 이 영화는 과연 먼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수자의 비애를 그린 영화인가? 샤이론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인간이며 일본인 이성애자인 평범하게 자란 남녀와는 무관한 이야기인가?

대답은 NO이다.

주인공 샤이론의 모습은 인종, 섹슈얼리티, 사회적 입장을 넘어, 우리 자신과 겹쳐진다.

"문라이트" 이것은 사람의 약함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제각각 약하다. 그 약함을 숨기고 강한 척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떨쳐낼 수 없는 외로움이 그들 가운데서 배어 나온다.

왕따를 당했던 과거를 불식하려고 샤이론은 몸을 단련하고 부하에겐 엄하게 대한다. 그래도 "물방울이 될 정도 울어버린" 그때의 감정은 그의 마음 속에 얼어있는 그대로이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닦으면 닦을수록 그는 외로워져 간다. 무거운 육체. 고급차. 직장에서의 지위. 남성적인 강함의 상징인 모든 것을 손에 넣어도 그는 외롭다. 고독하고 약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어른이 된 샤이론의 속에 있다. 힘으로 고독은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곧 구원이 찾아온다. 그에게 자신의 고독을 보여줄 상대가 단 한 명 있었다.

샤이론에게 케빈은 언제라도 자신을 부드럽게 비추는 달빛과 같은 존재였다. 비록 배신과 오랜 세월의 간극을 거쳐도 -.

샤이론에게 약함과 외로움을 털어놓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상대는 케빈 뿐이었다.

"이 사람의 앞에서는"자기자신"으로 있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상대가 인생에서 얼마나 있을까? 한번쯤 멈춰서고 싶어지는 질문이다. 연인이라도 부부라도, 부모라고 해도,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다.

샤이론은 그를 만나 자신의 약함과 마주하여 자기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케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자신의 약함을 알고 또 서로 인정하였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로 통하는 장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아름답다.

나에게 있어 샤이론은 결코 먼 나라의 소수자가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누구나가 한번쯤은 경험한 적이 있는 "순수하게 누군가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다. 인생에 지친 마음 깊은 곳조차에도 계속 남아있는, 아주 조금의 보석 같은 둘도 없는 마음.

라스트 씬 엄청난 안도감에 휩싸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되는 것은 자신을 샤이론에 겹쳐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인종 · 성적 · 사회적 입장을 넘어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친다. 누구에게든 동등하게 쏟아지는 달빛처럼.

(여담이지만, 샤이론이 정말 게이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그의 연애의 대상은 결코 "남성 일반"이 아니다. 샤이론과 케빈의 관계는 사랑으로도 오랜 쌓은 우정으로도 볼 수 있으며 동일한 비참한 환경에서 자란 자들의 위로와 동지애로도 볼 수 있다)

압도적인 이야기의 힘

이 영화를 누가 봐주었음 하냐고 문득 생각했을 때, 나는 일본의 경쟁사회에 위치한 성적으로 노멀한 남성들이야말로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샤이론의 외로움은 결코 일본의 남자와 무관하지 않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고 성공을 손에 들고 주위를 압도하려는 샤이론의 모습은 게이라기보다는 노멀한 남성의 그것에 가깝다.

먼 마이애미의 빈곤 지역의 게이 주인공과 현대 일본사회에서 경쟁에서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견뎌낸 끝에 과로사와 고독사하는 남자들이 문득 링크한다.

마지막으로.

요즘 미국 영화는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 많다.

이 영화는 그 점을 클리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이야기의 힘이 있기에, 제작자가 그것을 의식하고 있음을 관객에게 의식하게 만들지 않는다. 테마 자체는 싱싱하면서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매우 성숙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문라이트"가 브라더후드 영화라면, 같은 시기에 상영된 한국 영화 '아가씨'는 시스터후드가 짙은 서스펜스.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의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리메이크 한 것이지만, 이 영화 역시 압도적인 스토리와 연출의 재미 덕분에, 섹슈얼리티와 인종, 국적 관계없이 즐길 수 있다.

일본은 어떨까. 이런 이야기의 제작자가 지금 있을까. 노작가가 소녀의 동상에 정액이 어쩌고 하며 천진난만하게 들떠있을 때가 아니야, 진짜로.


원문은: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70422-00051499-gendaibiz-bus_all&p=1


설마 하던 내셔널 지오그래픽까지 케모노 프렌즈의 인기에 편승!


트윗 번역: 이것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려있는 서벌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2월호는 야생의 고양이 특집. 어서오세요(요코소)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서벌의 커다란 사진은 이쪽! #내셔널 지오그래픽 #케모노 프렌즈

현재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케모노 프렌즈"와 그 히로인 "서벌짱"이 굉장한 인기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xx한 프렌즈구나!" 등의 유행어를 이용해 영화나 상품 광고를 하거나 케모노 프렌즈의 19금 에로동인지를 찍어내 한탕 해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설마 하던 내셔널 지오그래픽 재팬 공식 계정까지 케모노 프렌즈의 인기에 편승하여 홍보를 한다는 농담 같은 일이 일어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에 대해 크게 부정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고 "유행을 이용하여 홍보를 하는 모습이 귀엽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애니메에 기대다니 의외다" 등 긍정적인 반응이 많은 점은 다행인 일이네요.

어찌됏든 현재 케모노 프렌즈의 인기, 대단합니다

트윗 링크: https://twitter.com/NatGeoMagJP/status/834602040781217793


『라라랜드』는 "야심적이지만 인종차별적인 뮤지컬" (『 WIRED』 영국판 리뷰) (번역) 영화

로스앤젤레스의 스카이라인은 항상 이렇게 핑크색인 건가? 빛나는 할리우드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애초에 그런 것에 의미 따윈 있는걸까?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는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물음에 서있다.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을 주역으로 기용한 이 영화는 가공과 현실을 교묘하게 배치한 도전적인 뮤지컬이다.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가장하고 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는 그렇다, 누구나 다른 무언가를 속이고 있다.영화의 두 주인공도 바로 그렇다. 스톤이 맡은 미아는 여배우를 지망하지만 잘 되지 않고 고슬링이 하는 세바스찬은 재즈 뮤지션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 현실은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라랜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꿈을 쫓는 두 사람이 일으키는 여러가지 실패를 그린 작품이다. 몇번의 우연한 만남을 거치며 두 사람은 함께하게 된다. 그들의 관계는 멈추는 일 없이 충돌하면서도 동시에 꿈을 쫓는다, 그리고 때로는 갑자기 노래하기도 한다.

장면은 선명하고 여러 장르의 음악이 사용된다. 댄스도 뛰어나다.『라라랜드』는 뮤지컬과 드라마가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

좀 과장된 장면과 거친 오마주도 있긴 하지만 그것에 의해서 드라마틱한 상호작용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뮤지컬은 감상적인 장면과 어설픈 연기로 빠져버리기 쉽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영화의 3분의 2를 넘은 시점에서 말싸움을 하는 장면에서도 퍼포먼스의 교묘함이 엿보인다. 뮤지컬 이외의 장면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작품의 구성이 어떤 시대인가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가 어디지?" 라는 미아의 세바스찬을 향한 대사는 시공간의 모호성이 강조되고 있다.

세트 디자인 속에도 그러한 모호함이 새겨져 있다. 1950년대의 댄스곡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시대착오적인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기도 한다. 주인공들의 삶처럼, 작품은 시대 설정을 "현대" 또는 "옛날"으로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고, 그 어딘가 불안정한 인상을 안겨준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의 모호성이 비현실적인 효과를 낳고있는 반면, 이 영화에 엿보이는 인종 편견은 특정 시대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재즈를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구자인 아프리카 계 미국인이 뒤로 밀려나있는 것이다.

백인 고슬링이 "재즈를 어떻게 구하는지"에 대해 몇번이나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아프리카 계 사람들이 그들이 만들어 낸 음악을 뒤에서 연주하고있다. 고슬링의 재즈 피아노와 스톤의 재즈 댄스에만 초점을 맞추는 장면이 여럿 있는 것은 때로는 인종차별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재즈나 뮤지컬에 대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계 미국인이나 성적 소수자 사람들을 소홀히 한다고 다양한 음악가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다. 지금의 시대에 보기에는 욕구불만이 쌓이는 것이다.

『라라랜드』는 『화이트워싱』 뮤지컬이다. 작품은 재미있다, 엠마 스톤은 훌륭하고 뮤지컬과 세트 디자인은 보고 있어 기분이 좋다. 그러나 재즈에 대한 영화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계 미국인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백인 주인공 2 명에게만 잘난 척 재즈 문화를 이야기 시키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카데미 상에선 높게 평가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할리우드는 할리우드를 그리는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http://www.wired.co.uk/article/la-la-land-trailer-review



영화 '암살' 한국인의 컴플렉스를 명확하게 간파할 수 있다 [70점] (번역) 영화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너무 반일색이 강한 항일 영화는 외면을 당한다고하지만, '암살'는 본국에서 1270 만명이 본 대히트작이되었다. 왜 이 작품 만은 이렇게 한국의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던 것인가. 그런 의문을 염두하여 보면 여러가지 일을 알게 된다.

1933년 한국 임시정부는 일본 정부요인과 그들에게 협력하는 민족의 배신자 '친일파'의 암살을 계획한다. 실행팀의 리더로서 아름다운 여자 저격수 안 오균 (전지현)을 지명한다. 하지만 이들은 3 명의 팀은 안에서 바깥에서 심한 방해를 만나는 것이었다.

한국의 비평가들도 지적하듯 이 영화는 반일 감정을 만족시켜주는 항일영화이기 때문에 히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 영화 초 근시라는 일종의 모에요소를 갖춘 미소녀 스나이퍼, 비현실적인 쌍둥이 설정, 주인공 측에만 유리한 총탄 내구력 판정이 가해지고있는 등 오히려 리얼리티 제쳐놓기의 엔터테인먼트 영화 있다. 리얼리티 있는 항일영화 따위가 있는가 하는 의문은 제쳐두고.

게다가 내용을 보면, 과연 한국인이 어떤 리더를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역사인식을 따르고 있는지 전해져 온다.

그것은 1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보고 싶어 했던 것으로부터도 상상할 수 있다. 요컨대 한국인은 이 영화에서 말해지는 듯한 역사를 원했다. 의식했는지는 몰라도, 이 영화를보고 굉장히 편안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들 조선민족은 한때 압도적으로 강한 적에게 목숨을 걸고 독립전쟁을 벌여 이겨냈단 것이라는 것.

객관적으로 보면 상당히 무리가있다 그것은 대부분 욕망에 가까운 역사 해석이다. 하지만 최동훈 감독은 이 영화에서 여러 번 '잊지 말아요'라며 독립 전사들에게 말하고있다. 수는 적지만, 투쟁한 용기있는 한국인은 있었던 것이다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정말 안타까운 기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역사상 대규모 국제 전쟁에서 한국인은 한번도 싸우지 않았다,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이 트라우마로 안고 있다는, 이것은 고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극중의 등장인물이 그것을 격렬하게 말했다.

그러한 자신의 약점, 약점을 여기까지 노골적으로 보여준 영화는 드문 것이 아닌가. 적어도 일본에서 공개되는 것에선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행히 일본인은 조상님이 특공까지 하여 세계 최강 미군 상대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분전을 보인 덕분에 이런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고 살고있다.

이 영화에 묻어나는 한국인의 고뇌, 패자의 역사를 지닌 민족 특유의 뿌리 깊은 콤플렉스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일본인은 혹시 그 자체조차 눈치 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이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적어두고 싶다. 비록 의식하지 않아도 일단 목숨을 걸고 싸워 준 사람들 덕분에 우리 일본인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우연히 전지현이라는 일본에서도 지명도 발군의 엽기적인 그녀가 주연인 덕분에 이런 재미있는 작품을 우리도 볼 수 있었다. 무언가 귀찮고 어울리기 어려운 이웃의 속내가 그려진 영화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몇 안되는 기회일 것이다.

영화는 액션도 괜찮으며, 스토리의 악센트을 붙이는 방법도 알기 쉬워 호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화면의 색상은 부 자연스러운 부분도 많고, 액션씬에 돌출된 그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결국 수준 이상으로 만들어져있는 것은 대단하다, 한국 영화 특유의 높은 엔터테인먼트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는 하지만 캐스트의 일부는 일본어 발음이 네이티브가 아니기 때문에 이 캐릭터가 일본인인지 한국인 친일파인지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일본의 관객에게는 마이너스겠지.

내용에는 할말이 많다, 특히 일본인 장교의 농담 같은 잔인함이나, 너는 오크냐? 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주역 측의 총탄 내구력 등은 기회주의의 극치이다. 하지만 어딘가 그 근처도 흐뭇하게 보이는 애교가 있다.

이런 영화를 보는 것으로, 서로의 나라의 본심이 보인다. 이 역시 한국이 가지는 중요한 일면. 나는 영화 '암살'의 개봉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싶다.

원문: http://movie.maeda-y.com/movie/02093.htm

암살이 일본에서 개봉한다기에 반응이 궁금하여 검색해봤더니 이런 글이 튀어나오길래 한번 번역해봤습니다.

박찬욱 감독 "화족 아가씨와 메이드 미소녀, 동성애를 그리고 싶었다" (인터뷰 번역) 영화

"이전부터 여성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사회의 차별과 싸우는 도식적인 영화가 아니라 세상의 눈과는 관계 없이, 그저 자유롭게 감정에 맡기고 움직이는 동성애자를 그리고 싶었다"

『올드보이』 등으로 칸을 열광시킨 귀재 박찬욱 최초의 관능 영화 『아가씨』. 무대는 1939년 일본 통치 하의 조선 반도. 세상에서 격리된 대저택에서 화족 아가씨 히데코의 아래에, 메이드의 미소녀 숙희가 찾아온다. 속고 속이는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압권의 에로티시즘이 방사된다.

"이 독특한 무대 설정은 『올드 보이』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프로듀서의 제안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문화에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 친밀감이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 경외심을 품고 있어요. 점령 하에서 한국의 근대화는 시작했고 일본의 필터를 통해 서양 문화가 도입됐습니다. 서양과 일본, 한국의 전통 3개가 어떤 의미 폭력적으로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 그 공간에선 좀 우스우면서 기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고 생각합니다"

본작에서는, 호쿠사이의 "문어와 해녀" 등의 탐미 우키요에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호쿠사이의 그림은 기괴하며 아름답고, 유머러스한 요소도 있다. 우키요에의 세계는 예술의 보고입니다"

http://bunshun.jp/articles/-/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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